현시대의 우리에게 전쟁은 가끔 농담처럼 건네지곤 한다. 분단국가로 사는 데 적응해서일까? 우리 바다 쪽으로 미사일을 쐈다는 소식에 겁을 먹기보다는 전쟁 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식의 농담을 주고받는다. 북측의 우스꽝스러운 발표가 들려오면 코웃음 치며 한 귀로 흘려버린다. 한국전쟁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진심으로 와닿지는 않는다.
그건 우리가 전쟁을 미디어로만 접했기 때문이다. TV 속에서, 학교의 배움에서, 책 속에서 접한 전쟁은 우리 앞에 살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으며 열심히 상상해봤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전쟁 중에 여성을 보호하는 시대는 지났다. 동등한 인간으로 다툼에 참여하거나 대비하거나 각자 선택해야 한다. 그 상상 속 광경은 책을 통해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일대에서 직접 전쟁에 참전하고 살아남은 여성 200여 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딱딱한 문답의 형태가 아니라 얼핏 소설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하지만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살아남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적어 내려간 기록물이다.
이야기의 주체인 여성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10대 소녀 시절 전쟁터로 향했다. 세탁병, 제빵병사, 빨래병 등 수많은 잡일을 맡기도 하고 저격병으로 활약한 여성도 있다. 얼마나 어린 소녀가 참전했냐면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보니 키가 10cm 자라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토록 어린 소녀 앞에서도 전쟁은 참혹하게 펼쳐졌다. 서로 죽고 죽이고, 땔감보다 많은 주검, 쏟아져나온 창자들, 불타버린 아군의 뼈, 동지를 살리기 위해 우는 아기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고통, 전쟁의 후유증 등 충격적인 경험담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돌아온 여성들에게 환대는 없었다.
“군대를 따라 베를린까지 다녀왔어. 두 개의 명예훈장과 메달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지. 집에서 3일을 지내고 나흘째 되는 날, 다들 자고 있는데, 이른 아침에 엄마가 나를 깨우더라고. ‘딸아, 네 짐은 내가 싸놨다. 집에서 나가주렴… 제발 떠나… 너한텐 아직 어린 여동생이 둘이나 있잖아. 네 동생들을 누가 며느리로 데려가겠니? 네가 4년이나 전쟁터에서 남자들이랑 있었던 걸 온 마을이 다 아는데…’ - 54p”
“저녁에 다들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데 시어머님이 내 남편을 부엌으로 데려가더니 우시는 거야. ‘지금 누구랑 결혼하겠다는 거냐? 전쟁터에서 데려온 여자라니…’ - 549p”
반대로 남성의 경험은 전쟁 영웅담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남성이 전하는 전쟁 앞에 여성들은 침묵했고,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래서 저자가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여성들은 다소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자신의 경험을 꺼내 보여주고, 차를 내어주고, 모임에 부르기도 하고, 직접 전화를 걸기도 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나의 엄마 이야기도. 심지어 전쟁터에 나갔던 여자들조차 알려 들지 않았다. 우연히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더라도, 그건 남자들의 전쟁 이야기이지 여자들의 전쟁은 아니다. 이들의 행동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매번 똑같다. 집에서나 전쟁을 같이 치른 여자들의 모임에서만 잠깐 눈물을 보인 뒤, 비로소 자신들의 전쟁, 나는 알지 못하는 전쟁에 대해서 입을 연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알지 못하는 여자들의 전쟁. 취재 여행을 다니면서 나는 여러 차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들의 목격자가 되고 유일한 청취자가 되었다. - 17p”
한국전쟁을 경험한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전쟁영웅이 존재하고 어디에서나 환대받는다. 어떤 전쟁영웅은 동상까지 세워져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엄밀히 말해 전쟁이란 결코 무용담이 생겨서는 안 되는 상황이며, 이를 활용해 남성을 우월하게 치장해서도 안 될 일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하늘을 보기가 두려웠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지 못했지. 갈아엎어 놓은 들판을 보는 것도 무서웠어. 그 땅위로 벌써 떼까마귀들이 유유히 돌아다녔지. 새들은 전쟁을 빨리도 잊더라고… - 554p”
이 책을 섬뜩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읽었던 건 책 속의 배경이 됐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지금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며칠이면 마무리될 줄 알았던 거대한 폭력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하루빨리 전쟁이 두 손이 들기를 바라며, 우리가 또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다시금 전쟁터에서 여성의 가치와 희생이 침묵 되지 않도록 시대의 목격자가 되는 일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억울함을 넘어 전쟁은 더이상 누군가의 얼굴을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에 참전했던 200여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으로 전쟁 회고담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온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체르노빌의 목소리>, <마지막 목격자들>, <아연 소녀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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