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언론, ”2023 여자 월드컵은 차별 개선의 분수령“
개막 전부터 여러 대표팀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요구
미국만 월드컵 상금 남녀가 똑같이 나눠 가져
열악한 처우·성추행 등 문제도 제기
우먼타임스 = 한기봉 기자
20일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2023 여자 월드컵 대회가 개막했다. 우리나라 대표팀은 사상 첫 8강 진출을 목표로 출전했다. 한국 대표팀은 25일 콜롬비아와 첫 경기를 벌인다.
1991년 12개 국이 출전해 처음 시작된 여자 월드컵은 이번이 9번째다. 전 대회인 2019년 프랑스 대회에서는 24개 국이 참가했다. 이번 대회는 역대 가장 많은 나라인 32개 국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누비며 축구 여왕의 자리를 놓고 경쟁한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북미와 유럽에서 여자 축구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 과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관객이 크게 늘어났다. 지난해 7월 런던에서 열린 ‘여자 유로 2022’ 영국-독일 결승전(영국 우승)에는 8만 7000명이 경기장을 찾아 남녀 유럽선수권대회를 통틀어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여자 선수들은 우승 말고도 또 하나의 적과 싸워야 한다. 바로 ‘상금 성차별’이다. 골프나 배구 같은 다른 종목도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각국 대표팀들의 단체행동 이어져
해외 언론들은 이번 여자 월드컵을 앞두고 남자 경기와 큰 차이가 나는 우승 상금에 대한 논란을 보도하면서 “이번 월드컵은 전 세계 여성 축구 선수들의 동일 임금을 위한 투쟁의 분수령이 될 것”(BBC)이라고 보도했다.
이번 대회에 걸린 총상금은 1억 5200만 달러(1959억 원)다. 클럽에 돌아가는 보상금을 뺀 순수 상금은 1억 1000만 달러. 2022 카타르 남성월드컵 총상금 4억 4,000만 달러의 4분의 1이다. 그나마 직전 대회인 프랑스 여성 월드컵(5,000만 달러)보다는 세 배 오른 액수이고, 2015년 대회 상금과 비교하면 열 배다.
각국 방송사가 내는 중계권료가 남자 월드컵보다 크게 적기 때문이다. 인기가 아직은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해도 적은 액수다. 카타르 월드컵 시청 인구는 약 50억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번 여자 월드컵 시청 인구는 20억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개막을 앞두고 주최국인 호주부터 나이지리아, 영국, 남아공,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표팀과 자국 축구협회 간에 상금 배분과 보너스 등을 두고 대립이 벌어졌다. 일부 대표팀은 불참을 무기로 자국 협회를 압박하기도 했다.
호주 여성 축구 대표팀 선수 23명은 17일 소셜미디어에 “국제축구연맹(FIFA)은 같은 성취를 한 여성에게 남성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상금만 준다”고 항의하는 영상을 올렸다. 이들은 “여성 선수들은 아직도 기본적 권리인 단체교섭권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남아공 대표팀 선수들은 지난 2일 보츠와나와의 평가전을 보이콧했다. 자국의 축구협회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체행동을 한 것이다. 나이지리아 대표팀 선수들 역시 수당 미지급을 이유로 훈련을 거부했다.
전 베트남 국가대표 선수인 응우옌 티 민 응우엣은 BBC에 “베트남 남자 선수 1명이 여자 선수 20명 이상의 연봉을 합친 것보다 많이 번다”며 “일부 여자 선수는 생계를 위해 온라인에서 물건을 팔아야 했다”고 말했다.
◇남녀 월드컵 상금을 똑같이 나누는 미국...메건 라피노의 투쟁
축구계에서 남녀 차별이 문제가 된 건 2015년부터다. 여자 축구 세계 1위 미국 대표팀의 살아있는 전설 메건 라피노가 주도했다.
당시 캐나다 월드컵에서 우승한 미국 여자 선수들은 상금으로 200만 달러를 받았다.
반면 남자 선수들은 그 전 해인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15위에 그치고도 800만 달러를 받았다. 협회가 주는 연봉과 수당도 큰 차이가 났다. 2014년 미국 여자 대표팀 최고 연봉자는 7만 2000달러를 받았지만 남자 대표 선수 4명은 40만 달러 이상을 받았다.
메건 라피노 등 여자 대표 선수 5명은 미국 축구협회를 양성평등고용위원회에 고발했다. 협회는 차등 보상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며 여자 선수들을 상대로 맞소송까지 제기했다.
미국 여자 팀은 2019년 프랑스 여자 월드컵에서 또다시 우승하면서 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라피노 등 28명은 월드컵이 끝난 3일 뒤 협회를 LA법원에 고소했다. 소송을 제기한 날은 국제여성의날이었다.
라피노는 뉴욕 시청에서 열린 2019년 월드컵 우승 기념 환영 만찬에서 축구계의 성 차별을 비난하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만났고 줄기차게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주장했다.
미국 축구협회와 여자 대표팀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5월 드디어 모든 소송을 취하하고 성별에 관계 없이 동일한 연봉·보너스·수당은 물론 동등한 대우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긴 단체교섭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FIFA 상금은 통합 관리되고 남녀에게 균일하게 배분된다. 남녀 대표팀은 중계권과 스폰서 수익도 똑같이 나눈다. 지난해 카타르 남성 월드컵에서 16강까지 오른 미국 대표팀은 1300만 달러(약 170억 원) 상금을 받았는데 협회 몫 10%를 빼고 남녀 대표팀이 585만 달러(약 76억 원)씩 처음으로 나눠 가졌다. 여자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뛰지 않고도 앉아서 평소보다 약 3배 많은 상금을 받은 것이다.
이번 여자 월드컵에서 미국팀이 우승하면 거꾸로 상금 절반은 남자 대표팀에게 줘야 한다.
미국 여자 대표팀의 투쟁은 다른 나라에도 확산됐다. 브라질, 잉글랜드, 웨일스, 호주,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남녀 선수에게 동일한 출전료를 주는 국가가 늘었다. 하지만 미국처럼 월드컵 상금을 똑같이 나눠 갖는 나라는 없다.
이번 월드컵은 라피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월드컵이다. 라피노는 38세로 팀내 최고령이다.
◇열악한 처우, 성추행도
차별은 임금에만 있지 않다. 잠비아 대표팀의 에바린 카통고 선수는 독일 ntv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흙과 잔디가 좋은 훈련장은 주로 남자 대표팀에 배정됐고, 심지어 남자 선수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느라 훈련 시간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잠비아의 최초 월드컵 진출을 이끈 브루스 음와페 잠비아 대표팀 감독은 이달 초 성추행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한 선수는 “감독이 성관계를 하고 싶어 하면 반드시 응해야 한다”며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여성 선수에 대한 성추행은 시에라리온, 가봉, 미국, 베네수엘라, 호주, 아이티, 스페인 등에서도 보고됐다.
◇FIFA 입장, "다음 대회부터는 동등하게 지급"
올해 3월 재선에 성공한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2026 남자 월드컵, 2027 여자 월드컵에서는 상금을 동등한 수준으로 맞추겠다는 목표를 공약했다.
그는 “여성들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FIFA는 이번 여자 월드컵에서 모든 선수에게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더라도 23명 엔트리 전원이 최소 3만 달러(3900만 원) 가량의 상금을 보장하는 새로운 상금 배분 방식을 마련했다. 16강 진출 시 선수 개인에게 돌아가는 상금은 6만 달러, 8강은 9만 달러, 준우승은 19만 5000달러, 우승팀은 27만 달러(약 3억 5000만 원)를 받는다.
각국 축구협회가 FIFA로부터 받은 월드컵 포상금 중 선수에게 돌아가는 비중을 자의적으로 조정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인판티노 회장이 여자 월드컵 상금의 일부가 꼭 선수에게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공약한 데 따른 조치다.
인판티노 회장은 이번 월드컵 개막 전 기자회견에서 “여자축구가 여전히 별로라거나, 재미없다거나, 남자축구의 열등한 판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 경기를 보면 환상적이라고 느낄 것”이라며 여자 축구를 높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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